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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크버스 소재로, 유혈・고어・식인 관련 표현이 있습니다.
애프터눈 레인버드
마치 웨딩홀처럼, 혹은 런던 가든에서 즐기는 오후의 티타임처럼 케이크 뷔페는 백색 기조의 생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빅토리아 양식을 조금이나마 차용한 듯했다. 입구를 지나치자 천사의 나팔이라 불리우는 백합과의 꽃이 소나와 츠바사의 머리 위에서 흔들렸다. 평소처럼 굽이 높은 부츠였던 소나는 머리를 숙여야 했다.
회장에 들어선 츠바사는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인 수백 조각의 케이크와 마주한다. 총 26종의 케이크라고 했다. 각각의 케이크가 체감상 무한으로 제공되고 있었다. 가히 케이크의 천국, 케이크의 산이었다. 디저트, 꽃, 과일, 레이스, 상냥하고 달콤하고 귀여운 무생물들. 저번 주에 새로 산 하늘색 쉬폰 원피스와 하트 모양 진주 장신구를 매치하고 소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그 사이를 거니는 일. 전부 츠바사에겐 ‘정답’인 행위다.
그러나 츠바사는 순간적으로 인상을 찌푸린다. ‘케이크’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떠올릴 때마다 머릿속을 누군가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 신경이 쏠린다.
뷔페 초대권을 받던 날도 그랬다. 카네오와 츠바사가 둘이서 만나던 날이었다-소나는 임무가 있어 오지 못했다-. 스튜디오에서 간단한 쇼츠를 함께 촬영하고, 카네오의 댄스 챌린지를 구경하고, 셀카 수십 장을 찍고, 근황을 토로하고 나서, 헤어질 즈음 카네오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도쿄 도심에 위치해 나름 이름이 있는 케이크 뷔페 식사권이었다.
“케이크가 잔뜩 있대. 아, 물론 다른 디저트도! 그런데 난 일정이 너무 많은데다가 케이크를 더 좋아하는 건 츠바사니까. 소나랑 둘이서 다녀오는 건 어때?”
한 호흡에 ‘케이크’를 세 번이나 말하다니! 물리적으로는 두 번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안다. 그러나 츠바사에게는 ‘소나’가 ‘케이크’로 치환되어 들렸다. ‘케이크’라는 보통명사가 어떤 인종들에게는 인간을 뜻한다. 그건 ‘포크’와 ‘케이크’를 아는 일반인이 표면적으로 떠올리는 개념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다. 이 단어가 츠바사에게만큼은 더없이 실질적이고 형태를 갖춘 위협, 혹은 먹잇감, 혹은 연인으로 다가온다는 뜻이다. 입 밖으로 내어 설명한 적은 없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세계만을 진실로 여기니까.
그러니까 츠바사는 ‘포크’였다. 운이 좋게도, 혹은 나쁘게도 ‘케이크’인 애인을 가진 포크.
츠바사는 케이크 뷔페에 가도 상대적 박탈감-케이크가 26종이나 있는데 제대로 맛을 느끼지 못한다니-만을 얻게 될 뿐이다. 카네오는 그 사실을 몰랐기에 작은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다. 츠바사는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확 말해 버릴까? 애초에 어쩌다 여기까지 말하지 않고 온 거람! 츠바사는 비밀을 오래 지키는 편도 아닌데-다른 누군가가 들었다면 의외의 자기 객관화라고 놀랄 독백이었다-.
내면의 갈등과 달리 츠바사는 새침하게 초대권을 집었다.
“고마워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케이크 뷔페는 인스타 피드에 올려두기에 좋았다. 게다가 생긴 것들이 귀여우니 츠바사의 취향에 맞았다. 맛이 나지 않을 거라면 눈이라도 즐거워야 했다.
…그렇게 지금이다. 안내받은 자리까지 가자 소나가 겉옷을 벗도록 도와주었다. 이전과 달리 퍽 능숙한 폼이다. 상큼하면서도 단 레몬 크림의 향과 얼그레이의 풍미가 동시에 느껴진다. ‘케이크로서의 소나 레인버드’ 특유의 향이다. 소나와 함께 있을 때는 언제나 그랬다. 옆 테이블은 뉴스를 틀어 놓은 채였다. 스피커에서 얼핏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린다. ‘포크 범죄’가 이번 달에만 벌써 다섯 건을 넘어섰습니다, 대책을 마련하라는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어…
“먼저 다녀와라, 아마모리.”
“응, 츠바사 금방 올게요?”
숨을 들이마시자 레몬 향이 폐부를 가득 채웠고, 반사적으로 군침이 돌았다. 츠바사는 얼른 케이크 진열대를 향해 총총 멀어진다. 조금씩 향이 옅어졌다. 마침내 사람들 사이에 뒤섞였을 때는 아무런 냄새도 느낄 수 없었다. 케이크는 음식이 아닌 정물처럼 보였다. 츠바사가 기대하던 대로였다.
주변을 둘러본다. 케이크가 메인이지만 곁들일 만한 가벼운 식사류와 다양한 디저트, 입가심으로 어울리는 여러 종류의 차도 준비되어 있다. 한숨이 나왔지만 주변에 사람이 많았으니 참았다. 플레이팅에만 치중해 케이크를 담았다. 하얗고 부드러운 머랭이 올라간 치즈 케이크, 마지팬으로 조심스레 장식한 티라미수, 버터 크림을 파스텔톤으로 물들인 레터링 조각 케이크, 말차로 만든 파운드, 윤기가 흐르는 초콜릿 장식이 들어간 오페라, 끝물에 들어선 벚꽃 무스를 올린 분홍빛 몽블랑…. 접시 위에 올라간 케이크들이 소꿉놀이용 모형처럼, 혹은 영양분을 가진 장난감처럼 보였다.
돌아오자 소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먼저 인스타 업로드용 사진을 찍었다.
“수평을 맞춰서, 츠바사 얼굴과 케이크가 모두 잘 나오도록, 각도와 줌인은 이 정도로 하고…평소처럼 천천히 열 장 이상 찍어 줘요. 알겠죠?”
“…….”
소나의 실력은 이럴 때만큼은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으나, 몇 년 간의 채점을 거쳐 객관적으로 이전보다는 나아져 있었다. 적어도 초점이 나간 사진은 찍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사진을 오십 장 정도 찍은 이후에는 시식이 있었다. 츠바사는 모든 케이크를 단 한 입 씩만 먹었다. 당연하게도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 모형을 집어먹는 느낌이 났다. 힘없이 포크를 내려놨다. 생존을 위해서는 식사를 지속해야 하지만 근래 들어 조금씩 의욕이 사라지고 있었다. ‘케이크’인 연인을 둔 것 치고 소나를 혹사시키는 편도 아니었기에 더 그럴지도 모른다. 츠바사는 특유의 자기중심적인 성정에 어울리지 않게-어쩌면, 자기중심적이기에 더욱-인간을 ‘섭취’하는 행위에 거부감과 죄책감을 가졌다. 이 와중에도 달콤한 향은 지척에서 풍기고 있어서 군침이 돈다는 점이 모순이다.
“아마모리, 괜찮나?”
“으응, …조금 맛없을지도….”
포크는 사회적으로 인식이 좋지 않았고, 츠바사가 얼굴이 알려진 직종인 관계로 둘은 바깥에서 은어를 사용했다. 이건 입맛이 없다는 표시다. 테이블 위에 잔뜩 놓인 케이크는 전부 소나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소나 레인버드는 직업 특성상 입에 넣을 수 있는 음식이라면 기계적으로 밀어넣을 수 있었으므로, 이런 식으로 츠바사의 인스타 촬영에 이용당하는 일은 흔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고개를 기울이던 소나가 맞은편에서 일어나 츠바사 곁으로 다가왔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소나쨩, 위로해 줄 거예요? 으음, 그렇게까지는 또 아닌데….”
츠바사는 소나가 드물게도 자신의 기분을 알아챈 줄 알고 투덜거렸다.
그 때였다.
소나가 일반인은 반응하지 못할 속도로 츠바사의 팔을 잡아챘다.
“에? 어?”
순식간에 소나의 품에 안겼다. 분홍빛 생머리가 뒤늦게 흩날렸다. 얼그레이가 섞인 레몬 향이 훅 풍겼다. 데이트할 때면 일상적으로 맡던 향이었으나 이번에는 지나치게 가까웠다. 츠바사가 얼떨떨한 얼굴로 소나를 올려다본다. 소나는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다.
항상 가라앉아 있는 붉은 눈이 먹음직스럽게 빛난다. 허기가 진다. 츠바사는 되살아나는 식욕을 애써 무시하고 시선을 따라갔다.
소나를 향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인영이 눈앞에 있었다. 테이블 나이프를 쥔 채였다. 처음 보는 여성이었다. 두 사람과 비슷한 나잇대로 보였는데 눈빛이 특히 탐욕스러웠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여자는 포크다. 드물게도 모델인 츠바사가 아닌 소나를 노리고 있다.
여자가 먼저 말했다.
“머리카락만 잘라갈게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츠바사는 드물게 입을 꾹 다물었다.
소나가 대답했다.
“이미 상해 미수다. 경찰서로 가지.”
“아니, 사실은 피도 좋아요. ……아니면 눈물은 어때요? 사실은 손가락이 먹고 싶어요…무엇이든 좋으니까 살점을 베어물게 해 줘요. 제발요. 한 번만요.”
여자는 이미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하기야 이성이 있다면 소나를 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나가 조심스럽게 츠바사를 안은 팔을 풀고 한 걸음을 내디뎠다. 안심하라는 듯이 츠바사의 어깨를 살짝 만져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츠바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 전부터 계속되던 생각이 마음을 뚫고 튀어나와 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소나가 함께 있어서, ‘케이크’가 곁에 있어서, 케이크가 진짜 음식처럼 느껴진다고, 욕심이 나 버린다고 말하면 소나쨩은 무슨 얼굴을 할까.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저 범죄자와 자신의 욕망은 같은 무늬를 그리고 있다면.
츠바사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말할 일은 없을 것이다. 몇 년 전 그날로부터 정립된 두 사람 사이의 균형을 무너트리지 않으려면 그래야 했다.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순탄하게 제압되는 일반인 범죄자가 보인다. 어쩐지 이전의 자신처럼 보였다.
츠바사는 멍한 눈빛으로 과거를 떠올린다.
두 사람은 파멸 직전까지 갔었다. 소나가 성인이 되고 츠바사가 졸업을 앞둔 때였다. 수많은 관계 파탄의 위기 중에서도 그날은 특별했다-데스 게임이라는 난관까지 해결하고 나왔으면서 무슨 문제가 그리 많은지 물어도 할 말은 없다-.
츠바사가 포크로 발현했다. 심지어 소나와 함께 있을 때, 둘이서 섹스하던 그 순간에! 그 때의 츠바사는 자제심이 특출나게 부족했다. 포크로 발현한 순간 밀어닥치는, 케이크를 향한 원초적인 욕망을 제어할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연한 수순처럼 소나를 물어뜯었다. 단순한 입질이 아니었다. 살기를 드러내며 송곳니를 박아넣어 피를 봤다.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났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소나의 목덜미에서 선혈이 흘렀고 츠바사는 그것을 홀린 듯이 핥았다. 뇌까지 직격하는 단맛이었다. 쾌감 같기도 했다. 온몸에서 설탕 냄새가 진동했다. 그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츠바사가 평생에 걸쳐 가장 사랑할 미식이었다.
다음 순간, 지금 생각해도 분통이 터지지만, 소나는 기사의 귀감처럼 공격자(어떻게 츠바사를 공격자로 인식할 수 있지?!)를 밀쳐 침대 아래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힘없이 쓰러진 츠바사는 입 안에 맴도는 달콤한 혈향을 음미하면서도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떨어지면서 부딪힌 등과 꼬리뼈가 욱신거렸다. 곧 츠바사가 아픔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다. 이번에는 신체적인 대처에 능숙한 소나도 잠시 망설였을 정도로 돌발 행동이었다. 속옷만 반쯤 걸친 상태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집 밖으로 도망치는 데에 성공했을지도 몰랐다. 곧 번개처럼 튀어나온 소나가 팔을 붙잡았다.
“이거 놔요!”
“아마모리, 잠시만.”
짧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언제나 물리적으로 패배하는 건 츠바사였다. 츠바사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곤 소나를 노려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럴 때 소나 레인버드는 거대한 벽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무생물. 거인! 왕거대 곰인형! 소나쨩!
그러나 츠바사의 몸짓이나 말 한 마디에 바로 반응하는 무생물은 또 없을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츠바사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조, 좋아하니까 그런 거라구요! 소나쨩한테서 달콤한 냄새가 나니까!”
“……!”
소나가 우뚝 멈췄다.
“왜 츠바사한테 화 내요?! 츠바사도, 츠바사도 무서운데, 등이랑 허리도 아프고, 그리고,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소나쨩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지금 생각하면 ‘좋아한다’는 첫 문장과 ‘달콤한 냄새’가 난다는 두 번째 문장에는 정말이지 아무런 관계도 없었으나, 소나는 그걸로 넘어가 주었다. 중요한 건 ‘좋아한다’였다. 츠바사는 말을 뱉은 직후 성년을 맞아 화려하게 파탄나는 둘의 관계를 눈앞에 그렸으나 소나의 반응은 반대였다. 소나가 성급하게 고개를 숙여왔고 츠바사는 습관처럼 입을 벌렸다. 금빛 머리카락이 츠바사를 덮으며 설탕처럼 쏟아졌다.
마음을 확인하고 처음 나눈 키스에서는 말 그대로 레몬 크림 맛이 났다. 잔향으로 얼그레이 내음이 함께 딸려왔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만이 세계에서 가장 달콤한 키스를 가진 것처럼 기분이 붕 떠올랐다. 중독된다는 게 이런 느낌일지도 몰랐다. 이제는 유일해진 단맛 때문인지 사랑이라는 감정 덕분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애써 후자로 생각하기로 했다. 소나의 목덜미에서 흘러내린 선혈이 밀착한 츠바사의 몸에 묻어났다. 피를 핥고 싶다는 생각을 내리누르면서, 츠바사는 몸을 떨었다.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섹스 파트너만 몇 년을 지속해 온 것에 비하면 순식간에 엄청난 쾌거를 이뤘다(아마도 그날 관계 중이 아니었다면, 속옷만 간신히 입은 상태여서 도망치려면 옷을 입어야 하는 게 아니었다면, 그리고 츠바사가 홧김에 울면서 외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의 관계는 지지부진하게 결착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상대가 소나 레인버드가 아니었더라면 츠바사는 상대를 말 그대로 두 동강 내고 진정한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이 점에서는 굉장히 운이 좋았다).
그렇게 지금까지 왔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경찰이 왔다. 소나가 손짓했다. 테이블에는 한 입 먹고 남겨진 케이크들만 남았다.
“의도적으로 포크를 붙였을 가능성이 있어.”
사정 청취 담당은 시구레였다. 조서 작성을 마치자 그가 꺼낸 첫 마디가 이랬다.
소나와 츠바사는 바로 뜻을 알아챘다. 시구레가 문장에서 주어를 생략하면 사사모리 그룹과 그 산하의 데스 게임 본부를 뜻하는 것이다.
츠바사가 포크라는 사실은 소나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지만, 소나가 케이크라는 사실은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 다양한 장소를 오가는 소나의 직업으로 인해 오늘 같은 사건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짧은 설명을 해야겠다. 호시카와 이츠와, 그리고 사사모리 그룹은 온전히 몰락하지 않았다. 데스 게임 본부는 여전히 음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KIKORI의 활동도 끝나지 않는다. 소나는 군인으로 활동하는 틈틈히 작전을 수행했다. 신분을 바꾸고 잠적한 ‘원본 소나’가 해외 작전을 모두 일임하는 대신 국내의 몇몇 임무는 복제 소나-이제는 온전히 소나 레인버드가 된-의 몫이었다. 시구레는 그 과정에서 협력하게 된 몇 안 되는 공권력이었다. KIKORI에 있어서는 소중한 인재다. 정의로운 경찰이라는 건 언제나 귀한 법이니까.
“저 쪽에서 먼저 왔다는 건,”
소나의 말에 시구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채도가 낮은 베이지색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그래. 우리가 꼬리를 잡기도 쉬워진다는 거지.”
츠바사는 대화를 얌전히 듣고 있었다. 시구레가 지금까지 조사한 파일을 넘겨주었다.
“자세한 건 본부에서 들을 수 있을 거야.”
시구레의 눈에 확신의 빛이 들었다. 정의를 표상하는 듯 마름모꼴로 빛나는 안광이다. 츠바사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잔당 같은 걸 잡으러 떠날 기분은 아니었지만, 끝없이 내면으로 침잠하고 싶은 시기였지만, 저 눈 앞에서는 이상하게도 투정을 덜 부리게 됐다-소나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둘은 함께 지내는 집으로 돌아왔다. 츠바사는 저녁을 걸렀다. 소나가 “아마모리. 식사는 챙겨라.”라고 나름대로 조심스럽게-그러나 한없이 무뚝뚝하게-말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츠바사는 거실에 있는 커다란 소파에 누워 발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면서 팔을 들어 손톱을 들여다본다. 겨우 며칠 전에 네일숍에 다녀왔는데, 난리통에 네일팁 하나가 빠져 있었다. 연분홍에서 시작해 옅은 노란색으로 끝나는 그라데이션 네일이었으나 이제는 딱 하나만 온전히 분홍빛이었다. 츠바사는 신경질이 나 소파에 머리를 마구 부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나가 다가왔다. 작은 동물에게 먹이를 주듯이 손가락을 내민다. 자연스러운 손짓이었다. 지금까지 종종 해 온 일이기도 했다. 소나가 내민 손가락에서 달콤한 향이 풍긴다. 츠바사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댔다가, 혀를 내밀어서 핥았다. 곧 심취한 듯 이를 세워서 잘근거렸다. 작은 고양이 같았다. 색이 미묘하게 다른 두 눈동자가 소나의 손가락에 집중한다. 소나의 손가락은 꼭 레몬 크림 맛이 나는 젤리 같았다.
당연한 수순처럼 입질이 심해진다. 소나는 말리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츠바사를 바라보는 눈에 조금씩 열기가 돌았다.
그러다 고개를 든 츠바사와 눈이 마주쳤다.
“……!”
그 순간 츠바사가 손가락을 뱉었다. 츠바사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난다.
“츠, 츠바사 잘래요. 소나쨩 안녕.”
“…….”
“소나쨩? 잘 자요.”
“……그래.”
츠바사가 총총거리며 방으로 들어간다. 소나는 그 뒷모습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츠바사는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보통 같은 침대를 쓰니 곧 소나도 올라오겠지만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소나의 표정은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었다. 찌르는 듯한 시선이 등에서 느껴졌으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소나의 그 고요한 눈빛이 불온했다. ‘그런’ 눈의 소나는 곧 츠바사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기상천외한 일을 벌이곤 했으니까….
츠바사는 줄곧 불안했다. 그건 처음으로 소나 레인버드의 목덜미를 물어서 피를 낸 날부터, 혹은 데스 게임에서 소나를 죽이려고 했을 때부터, 아니다, 소나에게 가장 먼저 무참히 살해당했을 때부터, …. 아니, 더 전이다. 만들어졌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기억, 소나 레인버드가 처음으로 아마모리 츠바사의 공격을 무력화시켰을 때부터 기인한 감정이다. 그 날 소나는 완벽하던 츠바사의 세계에 최초로 균열을 냈다. 츠바사는 그 날을 기점으로 불완전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츠바사가 자꾸만 떠올리는 건 두 번째로 강렬한 사건, 소나에게 처음으로 상처를 입힌 날이다. 얄궃게도 기억하기 쉬운 날이다. 결론적으로는 오늘부터 1일♡이었던 하루. 눈을 감으면 빨려들듯이 그 날로 돌아간다.
상대를 죽여 버리겠다고 악쓰는 것과 실제적으로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히는 건 ‘나’와 ‘너’의 거리만큼이나 큰 차이다. 사람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기에 ‘나’와 ‘너’는 영원히 멀리 있다. 그러나 하나가 되는 흉내는 낼 수 있다. 예를 들면 섭취라거나.
이는 인간사에 허락되는 행위가 아니었으므로 큰 대가를 동반한다. 소나의 피를 보는 순간 츠바사는 평생을 머무르던 안온한 세계 밖으로 한 발자국 밀려났다. 동산에서 스스로 떠나야 했던 최초의 인류와 같았다. 어떤 서사는 대를 이어 영원히 되풀이된다. 그건 스스로를 향한 최초의 의심이기도, 죄책감이기도 하다.
단단한 유리구로 둘러싸여 투명하고 아름답게만 보이던 츠바사의 세계에 최초로 금을 낸 건 소나 레인버드였는데, 소나 레인버드가 하필이면 케이크여서, 아마모리 츠바사가 포크로 각성해 버려서, 세계에 새로운 균열을 낸 것이다. 그리하여 츠바사는 바깥 세계-민낯의 자신-와 마주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변화의 전조였다. 완벽한 유리구 안에서 멸균된 인간은 성장하지 못한다.
물론 소나 레인버드는 차라리 멸균된 세계를 바라겠지만….
츠바사도 조금쯤은 같은 심정이었다. 이건 츠바사도 모르는 사이에 지척에 다가와 도사리던 사건이었다. 그 간악한 운명이 소나와 츠바사의 발목을 뱀의 송곳니처럼 꿰뚫은 것이다.
이런 일이 없었더라도 츠바사는 언젠가 스스로 알을 깨고 더 넓은 세계를 마주봤을 것이다. 그가 잘라내지 못하는 건 스스로의 사랑 이외에는 없었으므로.
그러나 세계란 언제나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법이었다.
츠바사가 소나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인간이 규정했으나 개인의 의지 바깥에서 인간의 체계가 살아 숨쉬는 이상 우리는 세계에 휘둘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츠바사가 이 모든 사유를 명징하게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 잠들기 전까지 츠바사가 떠올린 건 단편적인 이미지였다. 유리로 만든 아기 천사상, 흰 꽃잎을 늘어뜨린 천사의 나팔, 두 개의 가위, 포크, 멸균실, 거대한 우주, 그 우주를 상상해 버린 나머지 작고 초라하게 느껴져 한없이 구겨지는 츠바사의 기분. 모든 상징물들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날 밤에는 악몽을 꿨다. 오랜만에 유메마쿠라 네무가 꿈에 나왔다. 관련된 재능을 가져서인지, 네무는 사후에도 종종 츠바사의 꿈에 찾아오고는 했다.
익숙한 인영이 반가워 “네무쨩!”하며 달려가자 네무가 옅게 웃으며 츠바사를 안아주었다. 기억하던 대로 옅은 색 머리카락에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달콤한 향이 났다. 익숙한 홍차 내음…. 이건 네무쨩의 체향이 아닌데? 고개를 갸웃거리자 네무가 말했다.
─ 돌아와, 아마모리 양.
“네무쨩…?”
─ 이곳에 내가 있어. 레인버드 양도 있지.
츠바사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네무를 쳐다봤다. 무언가 이상했다. 상대의 품에 폭 안겼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보니 시야가 얼추 맞았다. 츠바사가 자라나는 동안 네무는 계속 멈춰 있었다. 아마도 기억 속에, 박제처럼…. 게다가 꿈 속의 네무는 왜곡되고 있었다. 츠바사가 알던 것과 다른 말을 한다. 모든 꿈은 원형을 유지할 수 없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몸소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네무가 다시 말했다.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그 표정만은 츠바사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과 꼭 같았다.
─ 아마모리 양은 원하지 않겠지만 유우도 있고….
─ 모든 게 준비되어 있어.
─ 이곳에서 포식하면 달콤할 거야….
단내가 점점 강해졌다. 레몬 설탕이 츠바사를 덮쳐오는 듯했다. 순식간에 식욕이 돈다. 몇 년 동안이나 최대한 자제했지만, 츠바사는 소나에게서 어떤 맛이 나는지 알고 있었다. 자기 전에 잘근거렸던 손가락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한 번만 원없이 깨물어 버리고 싶다. 딱 한 번만. 잘려서 너덜거릴 정도로. 그러고 나면 츠바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것을 뜯어낼 것이다. 자제할 길 없이 흘러나오는 피를 마시고 얇은 살점을 뜯어먹은 뒤 뼛조각을 오래도록 핥아먹을 것이다….
아니, 아니다. 이건 츠바사가 아니야! 츠바사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 이건 꿈이다!
츠바사는 마구 몸부림치다가 눈을 떴다. 평소처럼 소나에게 안긴 채였다. 꿈 속에서 맡던 단내가 그대로 풍겼다. 자신은 소나의 머리카락을 입에 물고 있었다.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을 듯하면서도 녹지 않는 레몬 설탕 맛. 소름이 돋아 머리카락을 뱉어 냈다. 가장 소름돋는 건 아쉬운 마음이 드는 자기 자신이었다.
찝찝한 악몽은 그걸로 끝이었다.
며칠 뒤, 둘은 잔당의 것으로 지목되는 폐건물 앞에 서 있었다. 소나는 혼자 오겠다고 했으나 츠바사가 따라왔다-이 과정에서 벌어진 지난한 말싸움은 생략하겠다-.
“떨어지지 마라.”
“알았어요. 츠바사가 그런 것도 못 지킬까 봐요?”
“…….”
소나의 못 미더운 눈길을 받은 츠바사가 항의했다.
“처음도 아니잖아요!”
투닥대긴 했으나 두 사람은 순조롭게 나아갔다. 츠바사의 말대로였다. 이런 임무가 처음은 아니었다. 운반하기 어려운 금고나 상대 물자를 모조리 박살내는 쪽이 효율적인 작전에서 츠바사의 절단 능력은 유용했다. 물론 임무 장소, 적진의 심부까지 츠바사를 운반하는 것은 소나의 몫이었다.
폐건물에는 이상하게 움직임이 없었다. 정보가 잘못되었나 의심할 정도였다. 소나가 주변을 경계했고, 츠바사는 잠금장치를 만날 때마다 손쉽게 절단 냈다. 지상층은 말 그대로 비어 있었기에 지하로 조금씩 진입했다.
마지막 층에는 기시감이 들게도, 모니터룸이 있었다.
츠바사는 자연스럽게 데스 게임 도중 들어섰던 모니터룸을 떠올린다. 그곳에서 수많은 진실이 밝혀졌었다. 등이 긴장으로 굳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될까…….
소나가 앞으로 나섰다.
“데이터가 있는지만 확인하고 파괴하겠다.”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모니터가 켜졌다. 수십 개의 모니터에 동시에 불이 들어오자 주변이 인공적인 빛으로 환해졌다.
모니터 안에는 호시카와 이츠와가 있었다. 안경을 내려쓴 고혹적인 미인이 모니터 속에서 수십 명으로 존재했다. 그들이 동시에 웃었다.
─ 안녕, 안녕? 방가방가? 오랜만이지, 이 모습?
“파괴하겠다.”
소나가 한 걸음 나서자, 어디선가 나타난 토르소들이 그를 가로막았다. 기계장치로 이루어진 단순한 전투 인형들이었다.
─ 아~ 잠시만, 잠시만~ 이야기는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 너희에게도 좋은 일일지도 모르는데?
츠바사가 외쳤다.
“조, 좋은 일이라뇨! 당신이 츠바사들한테 좋은 일을 할 리가…!”
─ 글쎄?
수십 개의 눈동자가 똑바로 츠바사를 쳐다봤다. 츠바사는 주춤대며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 소나를 먹고 싶지?
그 순간 츠바사는 우뚝 멈춰섰다.
─ 이곳에서 복제하면 마음껏 먹을 수 있잖아?
“…….”
츠바사는 악몽의 원인을 알았다. 지금을 예견했던 것이다.
─ 네 그 비정상적인 욕망은 오직 이곳에서만 해결할 수 있단다?
“아니야….”
─ 이 깜찍하게 뒤틀린 아가씨야.
츠바사는 생각한다. 자신이 포크로 발현한 건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가진 절단 능력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누군가를 손쉽게 해치는 기이한 재능이, 기질이, 언젠가는 정말로 타인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갈지도 모른다고….
온 몸을 던져 사랑해 버리고 만 상대를 참혹한 형태로 짓이겨 버릴지도 모른다고.
전부 소나 레인버드를 만나기 전까지는 알지 못하던 두려움이었다.
“싫어!”
츠바사는 그 순간 비명을 지르며 가위를 내리그었다. 모니터가 반으로 잘려나갔다. 그리고 또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부수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잘라서, 가루가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모니터를 갈랐을 뿐이었는데 그 안에서 붉은 액체가 쏟아졌다. 뜨거웠다. 당연하게도 혈향은 느껴지지 않아서, 그것이 그저 물감이나 잉크처럼 느껴졌다. 츠바사가 그것을 뒤집어쓰기 전 소나가 막아섰다. 소나는 쏟아지는 붉은 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맞았다. 금빛 머리카락이 피에 흠뻑 젖는다. 부츠 아래로 피 웅덩이가 고였다.
피투성이가 된 소나 레인버드. 아마모리 츠바사가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광경이다. 동시에 드는 생각이 있다. 내 케이크가 달콤하지 않은 피에 젖는다. 먹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츠바사가 망친 거야?”
‘아깝다’는 사유만으로도 죄책감과 절망감이 올라왔다. 츠바사는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했다. 시야가 눈물 때문에 흐릿해졌다. 소나를 걱정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해서는 안 될 방식으로 소나를 욕망하고 있다. 그러면서 또다시 달려들지 않기 위해 인내하고 있다.
욕망을 휘두르는 일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사랑하는 자에게는 결정적인 순간에 손을 거두게 되는 것일까? 끝없이 반복되는 상반된 사유의 굴레다. 츠바사는 결국 질리고 말았다. 이 지난한 과정이 선(善)이라면, 이것이 옳다면….
지옥에 떨어져도 좋으니 차라리 해방되고 싶다.
시야가 이지러진다. 눈을 감았다. 쓰러지려는 몸을 소나가 다가와 붙들었다.
츠바사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츠바사는 고열로 며칠간 앓아누웠다. 잠결에 듣기로는 심리적인 요인이 큰 것 같다고 했다. 츠바사가 폭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임무는 무사히 마친 듯했다.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계속해서 잠을 잤다. 기억도 나지 않는 수십 개의 꿈을 꿨다. 꿈 속 장소는 시도 때도 없이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다다른 꿈은 호텔에서 주최한 케이크 뷔페가 배경이었다. 소나와 함께 들렀던 곳이다. 천사의 나팔이 츠바사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고 순백의 생화 장식이 곳곳에 있었다. 흰 대리석 바닥은 언뜻 이 장소를 신성하게 비추었다.
그러나 회장에는 케이크가 한 조각도 없었다. 대신 거대한 제단처럼 보이는 테이블이 있을 뿐이었다.
식탁 위에는 소나가 누워 있었다. 얌전히 눈을 감고 양 손을 심장께에 올려두고 있었다. 이렇게 얌전히 누운 소나를 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츠바사는 테이블에 가까이 다가갔다. 단내가 났다. 이제는 츠바사에게 유일한 것으로 자리매김한 레몬 설탕과 얼그레이의 향이었다. 군침이 돌았다.
─ 먹어도 돼.
뒤편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네무가 다가와 웃고 있었다. 활짝 웃는 표정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네무가 아니었다. 츠바사는 비로소 깨달았다. 츠바사가 지닌 욕망이 네무의 탈을 쓰고 나타난 것이었다.
“네무쨩은 츠바사가 원하는 걸 알고 있었어요.”
─ 물론이야.
“그 말투도 네무쨩답지 않아요. …화내지 않을 거예요?”
눈 앞의 형체를 네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츠바사는 허락을 구했다. 네무가 눈을 접어 웃었다.
─ 화를 낼 이유가 없잖아.
그러면서 친절하게도 츠바사의 손에 둘로 나눠진 가위를 들려주었다. 츠바사는 잠시 가위를 내려다보았다. 꿈 특유의 어긋난 사고가 전개된다. 이곳이라면 괜찮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다.
쉽고도 간편하게 소나를 해체해 먹을 수 있다!
결정을 내린 츠바사는 먼저 소나의 팔을 갈랐다.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호시카와의 가짜 피와는 달리 제대로 향긋했다. 붉게 물들인 레몬 시럽을 뒤집어쓰는 것 같았다. 츠바사는 얼굴에 피를 잔뜩 묻힌 채 꺄르르 웃었다. 네무가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팔은 소나답지 않게도 마시멜로우처럼 부드러웠다. 한 입 베어물자 케이크처럼 뭉그러졌다. 뼈는 얼그레이 초콜릿처럼 똑똑 부러졌다! 달콤한 것으로 위장을 가득 채우는 경험이 얼마 만인가? 포크로 각성하고 나서 지금이 최초였다. 츠바사는 정신없이 먹었다. 팔을 먹어치우자 다음은 다리였고, 그 다음은 눈이었다. 항상 궁금했다. 이 붉은 눈알에서는 무슨 맛이 날지, 눈알을 핥아보고 싶은 마음을, 의식에서는 자각하지 못했으나 무의식에서는 언제나 갈구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만이 포크의 숙명이라는 듯이. 츠바사는 소나의 눈꺼풀을 들어올려 세 개의 손가락을 박아 넣었다. 그대로 눈알을 빼냈다. 어두운 루비를 닮아 빛나는 안구가 츠바사의 손에 치다 만 머랭처럼 들려 있었다. 먼저 핥았다. 짜릿한 레몬맛이 났다! 눈이 번쩍 뜨였다. 혀에 가하는 자극이라면 무엇이든 쾌락이 되었다. 츠바사는 더욱 신이 나서 소나의 붉은 눈을 수플레를 떠먹듯이 한입에 집어먹었다. 달콤하면서도 강한 신맛이 입 안을 점령했다. 시야에서 별이 탁탁 튀는 것 같았다. 세계가 오색빛으로 보였다. 꽃, 레이스, 산뜻하면서 세련된 장식들, 새로 산 원피스, 레몬 색으로 물들인 네일, 샹들리에, 그리고 케이크가 있었다. 귀여우면서 유해한 무생물. 전부 츠바사가 사랑하는 것들이다. 사방에 피가 튀었고 살점이 뭉크러졌다. 소나였던 것이 점점 해체되어 갔다. 5월은 결혼의 달이라는데 우리에겐 장례식이 될 것만 같다. 네무는 여전히 활짝 웃고 있었다. 그 흰 얼굴에도 점점이 피가 튀어 있었다. 츠바사는 그를 흘낏 돌아보았다. 네무의 얼굴이 설탕 반죽이 흘러내리듯 무너진다. 곧 그 앞에 서 있는 건 또 한 명의 ‘츠바사’였다. 츠바사의 욕망이 츠바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둘은 잠시 마주보았다. 곧 그 ‘츠바사’조차도 녹아내려 츠바사에게 흡수되었다. 이제 츠바사는 가위로 망설임 없이 소나의 배를 갈랐다. 비어져 나오는 달콤한 덩어리들, 설탕과 레몬즙과 럼, 크림과 홍찻잎, 베르가못 껍질의 향이 나는 그것들을 고개를 박고 먹어치웠다. 분홍빛 머리카락은 이미 피가 엉긴 지 오래였고 입가도 새빨개졌다.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소리 높여 울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행위가 지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다. 츠바사는 손을 뻗어 소나의 심장을
─────.
“아마모리?”
츠바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온 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흰 레이스 잠옷이 온통 젖어 달라붙었다.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단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폐부가 절로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츠바사는 마구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소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구나. 꿈이구나. 방금은 완전히 꿈이었어.
츠바사는 순간 안도했으나, 꿈보다 더 진하게 흘러나오는 단내에 곧 현기증을 느꼈다. 주체할 수 없이 허기가 돌았다. 어째서? 소나를 훑어보았다. 시선을 느낀 소나가 잠시 츠바사를 마주보더니, 헐렁하게 내린 소매를 걷어올려 주었다.
왼쪽 팔뚝이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그거…!”
경악한 츠바사가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비틀거렸다. 소나가 익숙하게 츠바사를 받아 안았다.
“그건 뭐예요?! 임무 중에 다쳤어요? 잠깐…왼팔에 힘주지 말아요!”
츠바사가 버둥거려서 오히려 소나가 힘을 더 주게 됐다. 사방에 설탕 냄새가 진동했다. 소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아마모리. 주고 싶은 게 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소나는 꿋꿋하게 츠바사를 안아 식당으로 데려갔다. 둘만이 사용하는, 츠바사에겐 다소 크고 소나에겐 작은 테이블에 접시와 컵이 놓여 있었다. 접시에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는데 지금 위치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
츠바사는 곧 발버둥을 치며 소나의 품에서 내려왔다.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보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건 몸이 주는 일차적 신호였다. 지나친 두려움, 혹은 환희의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접시 위에는 소나의 팔뚝살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이렇게나 레몬 시럽 냄새가 진동하는데. 츠바사는 떨리는 눈으로 소나를 돌아보았다. 소나가 특유의 ‘미친 짓을 해 놓고도 뻔뻔하고 강직한’ 태도로 설명했다.
“전부터 생각했어. 이번에 더 미뤄선 안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무슨….”
“후유증 같은 건 남지 않아. 흉터는 남을지도 모르지만. 다 낫게 되면 다음에는 임무가 없는 기간을 골라서 허벅지를….”
“자, 잠깐만요.”
츠바사는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손을 들어 소나의 말을 막은 츠바사가 재차 외쳤다.
“이, 이런 거 부탁한 적 없어요. 츠바사는…그냥, 그 때는 놀라서….”
“먹고 싶어했지 않나.”
소나의 말에 츠바사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작은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차마 반박할 수 없는 점이 가장 분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소나가 뻔뻔하게 말했다.
“어차피 다시 붙일 수도 없어. 개수대에 버려지는 것보단 먹는 게 좋을걸.”
그 말에 츠바사의 눈에 기어코 눈물이 고였다. 소나가 당황할 새도 없이 츠바사가 빽 소리쳤다.
“소나쨩 바보!!”
한동안 실랑이가 이어질 것 같았으나, 의외로 빠르게 지친 쪽은 츠바사였다. 소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평소보다 수 배로 강한 단내가 침샘을 끊임없이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방금 꾸었던 꿈이 츠바사의 어떤 것을 바꾸어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소나는 심지어 피까지 뽑은 듯했다. 츠바사가 세 번째로 좋아하는 귀여운 물방울 무늬 머그에 새빨간 피가 담겨 있었다. 아직 응고되지 않은 채 식어가는 혈액이 너무도 달콤해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쳐다보게 되었다.
시계를 흘끗 보았다. 벌써 오후였다. 그러니까 이건 꿈 속에서와는 달리 진짜 애프터눈 티였다. 얼 그레이 홍차맛을 느낄 수 있는,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한 티타임이었다. 소나는 맞은편에 앉아 츠바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심 기대하는 듯했다.
단순하면서 복잡하면서 또 다시 단순했던 아마모리 츠바사는 결국 소나 레인버드를 먹기로 결정한다.
망설이다가 포크로 작은 덩어리를 쿡 찍었다. 소나는 친절하게도 한 입 크기로 그것을 잘라 가볍게 익혀 두기까지 했다. 반죽 덩어리 같은 살점을 입에 넣었다. 레몬 파운드 케이크의 향이 확 퍼졌다. 식감은 분명 달랐지만 츠바사에게는 이 이상 부드러운 것이 없었다. 혀 끝에서 상큼한 단맛이 퍼져나갔다.
츠바사의 뺨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너무 맛있었다. 맛있어서 죽을 것 같았다. 꿈에서보다 훨씬 더 달콤했다.
사실은 성장하고 싶지 않았다. 멸균된 유리구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 상대의 살점을 기어코 베어 먹고도 이 안온한 세계가 언제까지나 나를 반겨 주었으면 좋겠다. 영원히 티타임을 즐기고 싶다. 그런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보다 못한 소나가 손수건을 가져와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었다. 츠바사는 입술을 깨물면서 눈물을 참았지만 가면 갈수록 점진적으로 서러워졌다. 울면서 한 입을 더 먹었다. 아주 천천히 녹여 먹었지만 허무하게 입 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세 번째, 네 번째 조각도 그랬다. 훌쩍이다가 이번에는 혈액을 마셨다. 피에서는 레몬이 가향된 얼그레이 홍차 맛이 났다. 홍차라고 하기엔 극도로 달아 설탕물처럼 느껴졌지만. 이걸 티타임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순간 불쾌한 깨달음이 마음을 스친다.
어쩌면 이 모든 지지부진한 과정이 츠바사의 인생이거나 사랑이라는 것.
하트 모양으로 예쁘게 잘라두고 싶었던 마음은 못생긴 형태로 뻗어나가 흉측해지고 말았다. 몇 년이나 참았지만 결국 소나쨩의 피와 살점을 취하고 있다. 사랑이 엉겨붙은 감정이 점점 기괴해져 간다. 우리는 서로에게 천착하다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입 속에 든 것이 너무나 달콤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유를 압도할 정도로. 소나 레인버드를 평생 머금은 채 살아가고 싶었다. 츠바사는 ‘맛’이 나는 살점을 씹어 삼킬 수 있다는 감격에 젖어 한동안 먹는 데에 열중했다. 아껴 먹으려 노력하는 것도 같았으나, 드디어 발현된 욕망이 이성을 상대로 처참하게 승리했다.
소나는 무표정이었으나 어쩐지 흐뭇해 보였다. 그는 츠바사가 먹는 모습을 한동안 가만히 쳐다보더니 물었다.
“맛이 어때.”
츠바사는 마지막 한 입을 앞두고 있었다. 물막으로 확장된 동공이 소나와 마주친다. 눈물이 또다시 흘렀다. 표정이 웃는 듯 우는 듯하게 일그러진다. 츠바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달아서…죽여 버리고 싶어요….”
츠바사는 마지막 살점을 신중하게 음미했다.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도 마쳤다. 내 레몬 타르트, 레몬 파운드 케이크, 베르가못 기름 향과 마들렌과 까눌레와 마카롱과 수플레, 쉬폰, 설탕이여 안녕. 당분간 또 다시 이별이야. 잔뜩 자고, 울고, 먹고, 솔직히 말하고 나자 사소한 문제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배가 조금이라도 차자 눈물이 흐르는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소나가 옅게나마 마주 미소지어 주었다.
그 얼굴을 보며 츠바사는 생각했다. 켜켜히 올라붙어 못생겨진 감정이라도 상관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츠바사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전 인류에서 예외가 있다면 단 한 명, 오직 츠바사의 마음을 내어준 소나 레인버드 뿐이다. 츠바사가 소나의 감정을 피와 살점의 단맛으로 어렴풋이 실감하듯이.
머그컵에 담긴 것을 마저 들이켰다. 사랑하는 상대의 일부를 삼키는 행위는 ‘아마모리 츠바사다운’ 자기 합리화로 끝을 맺는다.
츠바사는 소나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이제 모든 것이 괜찮았다.
아무렴 모든 인간은, 스스로의 사랑만 진실인 줄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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